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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で韓国史学の論文を読んでみる-4-

・訳文は韓国語の勉強を6年程度しかしていない者の試作的なものであり、間違いがあることを前提にして読んでください。間違いを指摘していただければありがたいと思います。漢字表記は旧漢字も新漢字も区別しないで用いています。


5세기 고구려의 천하관에서는 고구려만이 천하의 중심이었다.
5世紀、高句麗の天下観では高句麗だけが天下の中心であった。

그러나 고구려는 396년 후연의 책봉을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しかし高句麗は396年後燕の冊封を受けたことがあった。

이를 그대로 기재한다면 고구려 왕은 후연 황제의 신하가 되는 것이었다.
これをそのまま記載すれば、高句麗王は後燕の皇帝の臣下になるということだった。

고구려는 「광개토왕릉비」에서 중국 왕조를 배제하고,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 독자적인 천하를 설정하였다.
高句麗は「広開土王陵碑」では、中国王朝を排除し、遼東と韓半島一帯に独自の天下を設定している。

남조와 북조가 대립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長壽王은 북위에 조공하여,435년 북위로부터 요동의 지배를 공인받았다.
南朝と北朝が対立する時代状況の中で、長壽王は北魏に朝貢して、435年、北魏から遼東の支配を公認された。

이는 요동의 군사적·정치적 불안과도 연관이 있었다.
これは遼東の軍事的・政治的不安とも関連があった。

고구려는 400~402년사이 요동을 점령했지만 후연의 공격을 계속 허용했다.
高句麗は400〜402年間、遼東を占領したが、後燕の攻撃を継続的に受けていた(許容していた)。

이에 고구려는 중국중심의 국제질서에 참여하여 요동의 영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한편 으로는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 자국의 천하를 별도로 설정하였다.
ゆえに、高句麗は中国中心の国際秩序に参加して遼東の領有を正式に認められながらも、一方では遼東と韓半島一帯に自国の天下を個別に設定した。

고구려가 요동에 성을 축조하고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이후 중국 왕조에서도 요동을 고구 려의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高句麗は遼東に城を築造し支配力を強化したが、これ以後、中国王朝でも遼東を高句麗のものとして認識する傾向が増え始めた。

Ⅰ. 머리말
고구려는 391년 廣開土王(391~412)의 즉위 이후부터 활발한 征服活動을 단
행하였다.
Ⅰ. はじめに
高句麗は391年廣開土王(391〜412)の即位以来、活発な征服活動を断行
した。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으로 고구려는 이전보다 영토와 민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広開土王の征服活動で、高句麗は、以前よりも領土と人民の数が大幅に増えた。

광개토왕의 勳籍을 기리는 「廣開土王陵碑」에서도 광개토왕의 武勳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広開土王の勳籍を称える「廣開土王陵碑」で広開土王の武勳を重点的に扱っている。

「광개토왕릉비」와 관련한 연구성과는다음과 같다.
「廣開土王陵碑」と関連した研究成果は、以下の通りである。

「광개토왕릉비」의 전쟁 기사 중 백제·왜와 관련한 기사는 주로 고구려의 南進으로 인한 삼국의 세력 구도 변화에 주목하여 연구되었다.
「廣開土王陵碑」の戦争の記事の中で百済・倭に関する記事は、主に高句麗の南進による三国の勢力構図の変化に注目して研究された。

한편 後燕과 관련된 기사는 「광개토왕릉비」에는 보이지 않고, 『三國史記』에서만 등장한다.
一方、後燕に関する記事は「廣開土王陵碑」には見えず、「三國史記」のみ登場する。

이 경우는 주로 고구려와 중국 왕조의 외교 관계나 고구려의 중국 왕조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연구되었다.
この場合は、主に高句麗と中国王朝の外交関係や高句麗の中国の王朝に対する認識と関連して研究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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